CV
Critique_ Consideration on ‘Nogada’
Critique_ The Ethics for idiots
Review_ My Home Sweet Home
Review_ Metamorphosis



병신들을 위한 윤리학(가제)


밤마다 남몰래 정을 통하러 오는 사내의 정체를 캐고자 옷깃에 실을 꽂아 쫒아가 보니 다리가 가지런하게 수백개 달린 지네가 나오는데, 그 놈이 후에 처녀의 인신공양을 요구하며 패악질을 일삼는 무뢰배의 두목이 될지, 나랏님의 대궐문을 박차고 들어갈 역적의 수괴가 될지를 단박에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하다. 하물며, 정을 통하기는커녕 훤한 대낮의 두어 차례의 인터뷰와 그만큼의 술자리를 통해 누군가를 안다고 글을 쓰는 것 역시 참으로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꿈조차 나이를 먹은 백발의 작가가 아니라 이제 막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꿈조차 가늠하기가 힘든 봄볕의 작가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응당 ‘가제’라는 저 옹삭스런 사족은 무한한 변이의 가능성을 품은 미래의 작가를 가리킴과 동시에 혜안은커녕 소경에 가까운 글쓴이의 무력감과 무명(無明)의 소치임에 다름 아니다. 그저 2013년,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온 집을 불 지르고 등지려는 작가의 뒷모습을 짧게 마주친 자의 헛물만 잔뜩 켠 소문의 기록이 될 것이다.


1.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가기

김수환, 그는 집에서 태어났다. 대개의 누구나 그러하듯이 고아원도 공중변소도 비구니의 절간도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모든 이야기는 집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며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낙서와 일기, 최초의 사회적 관계인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잠깐 학교와 직장, 오다가다 만난 우연하고 필연적인 인연들이 등장하지만, 금세 자신의 가족을 꾸리면서 이야기는 여전히 가족의 주변을 맴돌고 종국엔 가족들이 둘러보는 데서 유언을 남기고 죽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인 유언을 남기지 않는 자는 집에서 버림받고 객사하는 행려병자와 집을 등진 고승들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김수환의 가족이야기 속 주요 등장인물은 할머니와 아버지이다. 그 둘은 대립항처럼 존재하는 듯 하면서도 가족을 지탱시켜준 노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그 둘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가 처음 우리에게 보여준 <노가다>연작은 작가가 아버지의 친구, 친구의 아버지들과 함께 노가대를 한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쇠가 된 내 팔>은 신체의 일부가 반복되는 노동에 ‘시노’라는 쇳덩어리 공구로 변해버린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화물차가 된 아버지>와 <배가 된 삼촌>에서는 아예 노동의 도구가 노동자와 결합되어 다른 생명체로 변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평생 항만 노동자로 살아온 아버지와 삼촌들은 스스로가 화물차와 배가 되어 노동의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도구의 사용자이자 도구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에게 화물차는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화물차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은 상당히 희화화 되어 있는데 작가가 노동을 인간이 주먹도끼를 만들어 냈을 때처럼 희열 가득했던 유희의 순간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가다 주식회사>에서는 <토이노가다>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해 마치 노동을 통해 자연-이제는 도시와-과 싸워 나가며 이루어진 가족의 원형들을 담아내고 있다.

<토이노가다>는 버려지고 하찮은 존재들로 치부되는 노동자와 노동의 도구들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환기시키며 더불어 거대한 항만과 철골구조물로 뒤덮인 세계에서 못쓰게 되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증의 시선을 보여준다. 문방구 앞 아이들의 뽑기 장난감처럼 유희화된 노동의 세계는 견고한 듯 보이는 세계의 구석에 감춰진 치졸함과 저열함에 대한 증언이고, 또 그 하찮고 업수이 여겨지는 것들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당당한 당위이기도 하였다.

이는 시노의 형상으로 지어진 거대한 <시노하우스>에서는 젊은 시절 다른 꿈을 찾아 세상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작가가 실재 아는 노동자들의 증명사진을 모아 노동자란 하찮은(?) 이름으로 호명 되기 전, 각각이 그린 꿈들을 찾아주는 애뜻한 시선과 포개진다. 그는 노동을 희망의 근거로 보고자 하였고 겨울삭풍을 막아주는 비닐창문에 비친 가족들의 실루엣을 긍정하였다.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노동과 유희가 결합하여 시작된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 오히려 가족을 묶어주었던 노동을 배제시키려는 사회적 억압을 그대로 재생산해내는 곳이 된다. 특히 사회에서 빗겨난 가장 낮은 자들이 갈망한 꿈들이 볼품없는 노동으로 대체되고, 그 노동이 다시 별 볼일 없는 삶과 억압의 구조를 지탱시켜나가고 있음을 간파한 작가에게 가족은 더 이상 희망의 근거가 아닌 가장 가까운 억압의 파수꾼이 되버린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노동의 세계가 가진 견고함들을 <토이노가다>와 같은 유희로 균열을 내보고자 했던 시도들은 할머니의 익살과 동화(童話)의 세계로 결합된다. <어느 날 어떤 것>은 작가가 그의 할머니가 노년에 그림과 일기로 끄집어낸 생애사에서 모티브와 형식을 취한 작업들의 모음이다. 놀랍게도 제대로 된 미술교육이나 맞춤법도 불분명한 할머니가 그려낸 작업들은 한글 민체(民體)의 자유분방하고 담백하나 소박한 긴장과 진솔함의 미적 성취들을 그대로 잇고 있다. 작가는 이를 고스란히 육화시켜 낸다.

일평생 먹과 벼루를 수 천개를 갈고 만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나올 수 있다는 글씨의 도를 깨우친 사대부들과 달리, 낫 놓고 ‘ㄱ’ 자도 모르지만 일평생 노동만으로 단련된 손과 마음으로 단박에 도교미학의 정수라 여겨지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체화한 서민들이 이룩한 글씨의 묘(妙)와 미(美)를 갖은 민체의 계보를 따르는 것이다. 가을 갈대가 제 몸을 바람에 맡겨 운율을 만들어 내듯 <어느 날 어떤 것> 역시 그 어떤 거스름도 없는 자연스러운 서정성을 보여준다. 그는 여기서 아버지의 세계와 불화하는 대신 할머니의 세계에 기대어 아버지와 삼촌들의 꿈과 노동을, 노숙자를, 버려진 비닐봉지와 폐지를, 할머니와 개와 식물들이 석굴암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진리와 다를게 없다는 평등함을 본다.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어떤 종교나 예술, 음, 이런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바램과 기원이고, 또, 그것들은 결국 어떤 하나로 연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왔어요. 그것을 어떻게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런 바램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언어를 인식하기전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 김수환과의 인터뷰, <변태>연작들에 대한 그의 답변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성거린다. 잘 설명은 못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혼란은 가족이다. 아버지의 권위있으니까 권위있다는 훈육과 할머니의 세상 모든 것들이 살아 말을 건네는 동화는 또 한편 하나의 바램과 욕망으로 귀속된다. 자신의 욕망이 처음 발현되는 곳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억압이 시작된 곳 가족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억압, 즉 말(言語)과 질서가 시작되기 전의 저 도도한 부정과 혼돈이 날뛰는 세계로 길을 나선다.


2. 현대의 아기장수, 성기소년

아기장수 설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모하여 아기를 죽이는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모된 살인은 마을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윤리가 된다. 공동체 사회에서 늙은이가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승해야 하는 아기를 죽이는 일은 무척이나 끔찍한 윤리이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지만 자식의 욕망대로 키울 수 없다. 살려둘 수 는 없다. 자식의 욕망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윤리와 배치될 때 가족은 억압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 안으면서 자식을 죽여야만 된다. 모든 부모의 비극, 모든 자식의 좌절은 저 윤리에서 비롯되었다. 역적이 되지 말고 노예가 되라.

이때 윤리란 이름으로 개인에게 강요되는 비극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종교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종교는 어떻게 고통을 회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을 당하느냐, 어떻게 육체적 고통, 가족의 상실, 세속적 패배 또는 타인의 고뇌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을 참을만하고 견딜만한 것으로 만드느냐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고통 당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혼란과 절망속에서 죽어가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논리적으로 혼란과 절망을 설명해줄 순 있어도 종교가 논리를 체화하고 있지는 않다. 먼저, 믿지 않고선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파국과 대결하려는 자기구원의 의지는 나약해지고 주어진 고통과 비극을 감내하라는 율법만이 지배하게 된다. 파국을 감내하면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보상해준다는 윤리에 욕망은 짓눌려지고 처음의 인간은 사라진다.

작가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공통분모에 노동만이 아니라 종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엿본다. 야심한 시각 인적도 차도 끊긴 도시의 도로에서 아버지의 새로운 화물차를 위해 할머니와 그녀의 무당언니가 토해내는 뜻 모를 독경소리와 징울림, 돼지머리를 삶고 절을 하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와 할머니의 공모가 이룩해낸 세계를 본다. 이들의 공모를 주관하는 종교는 인간의 가장 강렬한 욕망의 뿌리를 숙주삼아 성장하고 있음을 본다. 비단 그의 가족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변태,Metamorphosis>에는 작가에 의해 발견된 감춰진 욕망과 날뛰는 욕망의 주체들이 모두 등장한다. <화물차가 된 아버지>를 부수고 컨테이너 위에 돼지머리, 촛불, 억압의 검은 좌상을 차려놓고 노동이자 제단이 된 화물차를 끌고 가는 아버지와 그의 앞에서 영사되는 <가족>은 가족 이야기의 중간결산이다. 신음을 토해내는 아버지, 내장덩어리가 되가는 동생,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어머니 사이에서 작가는 성기소년(Dick-Boy)으로 변형된다. 아버지의 꿈들은 컨테이너 안에서 파괴되고 그의 날개는 제단의 무게에 짓이겨진 채로 왼손이 오른손이 되는 기만의 거울을 봐야한다. 거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가족들을 봐야 하는 저 끔찍함이란!

성기소년의 탄생과 함께 세계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인다. 부랑자와 노숙자들은 불볕을 쬐며 두 손을 하늘로 벌리고, 자위와 자해는 동의어가 되고, 인간은 불타오르는 세상속에서 춤을 추고, 머리에선 벌레들이 기어나온다. 아버지의 군함과 작가의 시노는 불태워지고, 회전의자는 주인 없이 돌아가고, 까닭 없이 개는 으르렁거리고, 거대한 유방과 음부는 세계를 뒤덮고 남근과 결합하여 자웅동체가 된다. 한 몸이 된 그들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다.

특히 아버지의 비참한 퍼포먼스가 행해지는 제단으로 가기 위해선 성기소년이자 그가 억압의 잠금장치를 푼 세계를 수호하는 <욕망의 데바>를 지나야 한다. 이 욕망의 신들은 음부와 남근이 뽑혀진 머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절간의 금강역사상의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1930년대 유럽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바타이유가 조직한 비밀결사집단 아셀파르(ACEPHALE)의 현대적 재림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변형된 신체와 자웅동체, 즉, 병신들로 표상되는 인간의 모습은 세상을 억압하고 분리하는 노예의 윤리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꿈이자 욕망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윤리와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복원인 것이다.

<변태>에서 종합되어지는 김수환의 가족이야기는 가족과 개인을 억압하는 세계의 윤리안에 공모되고 은폐된 비밀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두근두근 내 인생이 자근자근 짓밟히지 않으려 평생을 노예로 살아가는 과거의 인간이란 단어를 지우고,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인간을 분만하는 세계의 고통과 희열로 가득한 신음소리인 것이다. 노동이, 욕망이, 종교가 제 빛을 발하면서 불길 속에 내려앉는 집을 보며 세계는 성기소년과 함께 인간을 위한 새로운 윤리가 선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태초의 세계가 언어가 아닌 소리로 시작되었듯이 성기소년은 구음과 방언으로 가득찬 세상의 아우성을 그대로 들려준다. 망루에서 거리에서 땅과 바다속에서 들려오는 이 웅웅거리는 소리는 오직 세상의 파국앞에서 눈을 감지 않고, 귀를 막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만 들릴 것이다. 한참이나 소경인 내가 들은 성기소년의 새로운 윤리는 이것이다.


Occupy Everything with Freaks! and Demand Nothing!


그럼에도 성기소년은 쓸쓸할 것이다. 여전히 집 주변을 서성거릴 것이다. 집은 금세 서까래가 올라가고 지붕도 새로이 단장되겠지만 윤리도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윤리에 지워질 것이고 그는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그가 작가란 천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한재섭(미술사)